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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축하의 마음, 감사의 마음

부지런히 살자 2018. 11. 27. 10:40

"부모 잃은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말 없는 것이 위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서 죽어도 호상(好喪)이라 말하지 말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 있다
해애 해?
말아야 해?
금액은 얼마를 해야 하나?
심지어 김영란법까지
 따지기도 한다.
구성원이 수백 명을 넘게 되면 단 한주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본인의 결혼, 아기 돌 그리고 부모님과 처부모 또 시부모의 별세......!
속된 말로 백년손님이지 사위 자식 개자식이니 처갓집 족보는 게 족보라는 등의 말이 있지만 이젠 '처 부모=내 부모'와 같은 동의어가 되었으니 수백 명의 조직에서 결혼식과 돌잔치 그리고 장례식의 경조사에 들어가는 예산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예전에 보모님의 칠순과 팔순까지 잔치를 벌이곤 했으니 요즘은 그런 일은 없다. 심지어 조부모가 별세까지 부고장 알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에 비하면 요즘이야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
이같이 경조사가 많아지다 보니 요즘 젊은 직원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로 할 사람 안 할 사람을 따지며 주거니 받거니를 선별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같은 국가직 공무원은 이동이 매우 잦고 끝에서 끝으로의 이동까지 전국을 생활권으로 타 지역 전별이 많다 보니 흔히 말하는 '먹튀'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결혼한 다음 고향 가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보니 본전 생각이 안 나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참석하지 않고 축의금 봉투만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 대표로 참석하는 사람에게 전달해 달라고 봉투를 모아서 전달하기도 하지만 요즘 예식장의 음식 비용이 장난 아니게 비싸다 보니 5만 원 낼 바에야 참석하지 않은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10만 원을 하기엔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지난 10월은 유난히 결혼식이 많았다.
매주 한두 건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한 달 동안에 7건이었는데 최소한으로 한다 쳐도 35만 원 경조사비가 지출된다. 그러나 그중에는 또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 실제론 더 들어간다.
결국 젊은 친구들의 결혼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핑계를 대고 봉투만 전다라 해주는 것이 도리어 도와주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식장의 '뷔페 음식'에 대한 적응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 예식장의 '뷔페 음식은 아주 저급한 음식으로 치부하고 만다.' 비싼 음식값을 못하는 예식장의 음식을 먹을 바엔 차라리 도로 주변의 기사식당의 뷔페가 낫다고 여기기도 한다.
'
적어도 기사식당은 시간에 쫓겨서 먹지는 않으며 시끄럽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는 경조사가 있다.
부모와 배우자를 먼저 보낸 사람들의 장례식장의 참석과 조의금이다.
결혼식의 경우 대체로 직장 근처에서 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례식의 경우 부모님의 거주지에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다녀오기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선택이 아닌 필수적으로 조의금은 전달하여 애쓴다.

부고장은 'SMS'로 하게 된다.
그런데 모르는 이름이다.
아마도 올해 전입한 신임 순경이란 생각을 한다.
한 번이라도 얼굴을 봤으면 이름이 기억날 텐데.... 전혀 생소한 이름으로 보아 올해 전입한 신임순경일 것이다.
그러나 참석하기엔 거리가 멀다. 경기도를 벗어난다.
얼굴도 모르는 신임 순경이고 거리마저 멀다 보니 참석하 가는 어려워서 부의금 봉투만 보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
젊은 친구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계장님 안녕하세요."
누구신가요?
"저는 00 파출소 000순경입니다."
아예 지난번 아버님 돌아가셨는데 참석도 못하고 미안해요.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참석 못 해서 내가 미안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힘내요.
" 예 감사합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계속하여 도리어 내가 무안 해진다.
그러나 내가 겪어봐서 안다.
내가 서른의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도 젊었지만 아버지도 젊은 불과 쉰 여덟이셨다.
딱 지금의 내 나이에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저 친구의 아버지도 나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직접 경찰서까지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걸 보면 예의는 깍듯이 배웠나 보다.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주변 사람의 할 일이다.